2014 3월 03

Design in Cinema – 2.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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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지 디자이너는 프라다를 입을 시간이 없다

 

패션잡지 세계의 인물들과 경쟁관계를 실감나게 그려내어 큰 호응을 얻었던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2006).
이 영화는 실제 <보그>의 편집장인 안나 윈투어를 모델로 했다고 알려져 있다. 이 영화의 배경은 뉴욕이다. 왜 뉴욕이어야만 했을까? 뉴욕은 문화, 예술, 경제의 중심지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미디어의 중심지이다. 거대 잡지그룹 콘데나스트와 허스트는 맨해튼의 중심에서 각축을 벌이고 있다. 이제 주인공들의 무대가 되는 잡지세계를 디자이너의 눈으로 한번 들여다보자.
뉴욕이 아닌 지방 명문대 출신인 앤디는 푸른 꿈을 안고 뉴욕으로 상경했지만 상황은 녹록지 않다. 결국 신문기자가 되고 싶은 마음을 누르고 패션잡지 <런어웨이>의 편집장 미란다의 비서직에 응모를 한다. 패션과는 상관없이 살아온 앤디는 좌충우돌하며 좌절도 하지만 서서히 패션잡지 산업에 적응해가기 시작한다. 그러던 어느 날, 편집장 미란다가 자신의 집으로 책을 가져오는 일을 맡으라고 지시한다. 여기에서 ‘그 책(the book)’이란 무엇일까?

앤디가 첫 출근한 날 선배 에밀리가 거만하게 아무에게나 맡길 수 없는 책이라고 으스대던 책,
밤 10시 반이나 돼서야 디자인팀에서 넘어오는 책,
커다랗고 두꺼우며 포스트잇이 잔뜩 붙어 있는 링제본의 책.

 

이 책은 바로 패션잡지 <런어웨이>의 가제본이다.

편집회의에서 결정된 기획안대로 취재하고 촬영해 디자인팀으로 넘겨진 것을 레이아웃하고 컬러프린팅하여 링제본을 한 책이다. 즉 <런어웨이> 다음호의 모든 것이 담긴 책이다. 거기에 각 파트의 수정된 부분에 포스트잇이 붙여져 편집장에게 전달되는 것이다. 이 책을 편집장이 새벽까지 검토하고 아침에 출근하며 앤디의 책상 위에 던져 놓으면 각 파트 담당자들이 우루루 달려들어 분철한 후 자신의 꼭지에 체크된 수정사항대로 원고와 사진을 교체하거나 재촬영해 디자인팀으로 넘긴다. 이때가 어림잡아 늦은 오후이고 디자인팀에서 디자인이 마무리되는 때가 밤 10시 반 정도인 것이다. 이 과정을 인쇄 직전까지 끝없이 반복한다고 하니 얼마나 힘들고 지난한 일이겠는가. 물론 완성도는 비교할 수 없이 높아질 수밖에 없다.

 

영화 중반에 편집회의 장면이 나온다. 그 자리에서는 놀랍게도 겨울호를 만드는 지금 2월호 모델 섭외와 여름호 기획까지 언급된다. 실제로 보그는 발행 3개월 전부터 작업이 시작된다고 한다. 이번 시즌이 아닌 다음 시즌을 먼저 취재하기 때문이다. 그달 그달 취재해서 제작하는 한국적 상황과는 엄청난 차이가 난다. 발행부수만 해도 천지차이다. 국내에서는 발행부수가 수만 부에 불과하지만 보그의 경우는 100만 부가 넘어간다. 이런 규모의 경제가 세계 최고를 만들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잡지 디자이너의 밤을 불사르는 야근은 <보그>도 어쩔 수 없다. 모든 작업과정의 끝에 디자인 작업이 놓여 있기 때문이다.
디자이너가 정신없이 바쁜 장면은 영화 속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나이젤의 작업 장면을 보면 그의 등 뒤로 한 달 동안의 일정이 빼곡하게 적힌 일정표가 모니터에 떠 있다거나(악마는 프라다…), 편집장의 컨펌을 받기 위해 몇 개의 시안보드를 들고 안달하는 디자이너(완벽한 그녀…) 등이 그것이다.

 

앞서 말했던 링제본 책은 <런어웨이> 잡지의 모든 것이 담겨 있는 1급 비밀이다. 그런 만큼 신뢰할 수 없고 어설픈 비서에게는 맡길 수 없는 중책인 것이다. 만약에 이런 정보가 상대편 잡지 쪽에 넘어간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영화 <완벽한 그녀에게 딱 한 가지 없는 것>(2004)에서 그 결과를 볼 수 있다.

제나 링크가 편집장을 맡고 있는 패션잡지 <포이즈>의 정보가 경쟁지 <스파클>로 계속해서 새어 나가는 바람에 낭패를 겪는다. <스파클>은 <포이즈>와 동일한 기획에 한발 더 앞선 내용을 다룬다. <포이즈>가 표지모델 제니퍼 로페즈를 써서 ‘그녀의 10가지 비밀’을 내놓으면, <스파클>은 동일한 표지에다가 한 술 더 떠 ‘11가지 비밀’로 다루는 식이다. 가판대에 나란히 놓여 비교되며 판매되는 상황에서는 매우 치명적이다. 잡지사의 흥망이 달린 중요한 일이랄까. 하지만 영화와 달리 패션잡지의 표지모델이 경쟁지와 똑같은 경우는 실제로는 거의 불가능하다. 당일치기가 아니라 사전에 섭외가 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설사 잡지사가 몰랐다고 하더라도 모델 자신이 같은 타깃층의 잡지에 표지로 등장하는 건 도덕적 책임에 의해서라도 사전에 거절하는 것이 관례이기 때문이다.

예외적인 것은 영화잡지나 시사잡지이다. 당시의 최고 이슈가 되는 인물을 표지로 하기 때문에 겹칠 확률이 높다. 이때 그 인물을 어떤 시각으로 다루어 변별성을 주느냐가 디자인팀의 고민이다. 실제로 과거 노태우 대통령 퇴임 후 비자금 사건 때 시사주간지의 표지가 충돌했던 적이 있다. 두 주간지의 표지가 만원짜리 지폐의 세종대왕 얼굴에 노태우 대통령 얼굴을 합성했던 것이다. 같은 인물이 나왔다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아이디어가 겹쳤다는 것이 문제였다. 두 시사지가 가판대에 걸려 있는 모습에 보는 내 마음이 다 졸아들 정도였으니 디자인을 한 당사자들은 오죽했을까. 이 교훈 덕분에 표지가 겹칠 만큼 큰 이슈의 표지를 디자인할 때는 경쟁지 디자이너는 평소에 어떤 방식으로 작업해 왔고 이번 이슈에 어떻게 대처할까 하는 데까지 신경을 쓰게 되었다. 잡지를 디자인한다는 것은 결국 수많은 커뮤니케이션의 결과이며 다양한 상황을 전제로 판단한 콘텐츠의 적합한 시각화 작업이다.

 

영화 <완벽한 그녀에게…>를 보면 주인공이 길거리 가판대에서 자신이 만든 잡지 위에 전시된 경쟁지를 몰래 들어내서 구석으로 가져다 놓는 장면이 있다. 시사주간지 디자인을 하던 시절 광화문 가판대에서 내가 저질렀던 행동이 떠올라 웃을 수밖에 없었다. 잡지디자인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 한 가지는 자신이 디자인하는 매체에 대한 무한한 애정이다.

 

출처: 타이포그래피 서울 – TypographySeoul, http://www.typographyseoul.com

Design in Cinema – 1. 시작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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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이너는 영화에서 디자인을 본다

 

언제부터 그런 버릇이 시작되었는지 정확하게 기억이 나진 않습니다.

다만 어느 순간부터 영화의 주된 이야기와 상관없이 영화 속에 스며 있는 디자인을 찾아 끄집어내고 엿보는 것이 혼자만의 비밀스런 기쁨이 되었습니다.

예전 과학잡지 아트디렉터 시절 만났던 필자의 컬럼명이자 책제목이 떠오르네요 – ‘물리학자는 영화에서 과학을 본다’. 
그렇다면 “디자이너는 영화에서 디자인을 본다”도 가능하다 싶어 겁도 없이 연재 요청을 수락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히 하고 싶은 것은 
”영화에서 디자인을 본다”라는 말이 영화 자체의 디자인적 스타일이나 예술영화에 국한된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앞으로 쓰게 될 글에서는 영화의 주된 줄거리나 테마에 직접적으로 관여하는 건 아니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찾아낼 수 있는 디자인, 디자이너란 직업세계 등을 티타임의 수다처럼 소소하고 즐겁게 풀어내려 합니다.

예를 들어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와 <바닐라 스카이>, <완벽하게 그녀에게 딱 한 가지 없는 것>이라는 영화를 볼까요?
 누군가는 이 영화들의 공통점이 뭐냐고 물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전 이 영화들에서 미국의 잡지산업과 디자인 프로세스를 엿봅니다.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를 보며 
밤늦은 시간 비서 앤디가 편집장에서 전달하던 스프링 제본의 두꺼운 책이 무엇인지 궁금했던 사람들을 위해, 
마치 영화 속 이스터에그처럼 숨겨진 디자인에 관한 이야기를 쓰고자 합니다.

 

출처: 타이포그래피 서울 – TypographySeoul, http://www.typographyseou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