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ign in Cinema – 10. <킹콩>(1933, 1976, 2005)

Posted by | 3월 05, 2014 | BLOG, News*, PRESS*, Story | 2 Comments

디자이너, 킹콩의 시선으로 바라보다

 

뉴욕이란 도시를 생각할 때 떠오르는 수많은 상징 중에서 가장 압도적인 것은 한 건물이다. 건물치고는 이름도 거창한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Empire State Building)’ – 엠파이어 스테이트는 뉴욕스테이트, 즉 뉴욕주의 별명이다. 윌리엄 램의 설계로 1931년에 세워진 이 건물은 수많은 영화 속에서 그 모습을 드러냈다. 영화 <러브 어페어>나 <잠 못 이루는 시애틀> 같이 로맨틱한 곳의 배경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주로 테러나 공격의 대상이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먼저 이 빌딩에 오른 것은 킹콩이다.

<킹콩>은 영화로만도 세 번 제작되었다. 1933년에 제작된 첫 번째 영화에서부터 킹콩은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에 오른다. 두 번째, 1977년 작에서는 지금은 사라진 세계무역센터에 오르지만 세 번째인 2005년에는 다시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이다. 물론 배경이 첫 번째 영화와 같기도 하지만 여기엔 또 다른 의미가 있다. 영화를 감독한 피터 잭슨(Peter Jackson )이 시대적 배경을 1933년으로 정한 것은 이 시대가 “마지막 탐험의 시대”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인공위성도 없고, 전자기기와 컴퓨터가 없는 아날로그 기계시대였기 때문에 미지의 세계가 가능하고, 모험과 탐험도 가능한 시절이었던 것이다.

 


▲ (위) 센트럴파크. 지금은 녹지공간이지만 대공황 당시에는 판자촌 슬럼가를 방불케했다.
(아래, 좌) 기계의 발달은 화석연료 소비량을 늘렸고 도시는 스모그로 가득했다.
(아래, 우) 전세계적으로 몰아친 대공황은 대량실업을 불러일으켰다.

 

황량한 센트럴파크(Central Park)의 전경과 함께 펼쳐지는 음울한 1930년대의 뉴욕 풍경. 거리는 스모그로 가득 차있고, 실업자들은 줄을 서서 구세군이 나눠주는 구호식품을 기다리고 있다. 블랙 먼데이(Black monday)라고 일컫는 1929년 10월 24일, 뉴욕 주식시장의 대폭락으로 세계는 경제공황에 빠지고 제 1차 세계대전 전승국이었던 미국 경제의 황금기도 맥을 추지 못하고 몰락하던 시기다.

조그만 소극장에서 코메디를 연기하는 여주인공 앤 대로우(나오미 왓츠)도 극장이 차압을 당하자 갈 곳이 없어지게 된다. 자신이 흠모하는 극작가 잭 드리스콜이 소속된 사무실의 관계자를 찾아가 일자리를 하소연 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변두리 스트립쇼 극장에 가보라는 조언뿐이다.

 


▲ (위) 대공황 시절, 무명 여배우의 선택은 좁기 그지 없다.
(아래, 좌) 투자자들을 설득하는 칼 덴햄 감독.
(아래, 우) 투자자들의 추적을 뿌리치고 해외 촬영을 떠나려는 칼 감독이 수배한 배, 벤쳐호.

 

한편 도시의 다른 한 곳에서는 영화감독 칼 덴햄(잭 블랙)이 투자자들을 위한 시사회를 열고 있다. 담배연기 자욱한 시사실 분위기는 무겁다. 투자자들은 칼의 독특한 취향과 고집으로 가득한 영화가 못마땅하기만 하다. 결국은 영화를 접고 다른 영화사에 팔기로 결론을 내린다. 이를 눈치 챈 칼은 한 발 앞서 조수와 함께 촬영 기자재를 빼돌려 해외 촬영을 떠나기로 한다. 그러나 섭외했던 여배우가 출연을 거부한 탓에 급작스레 여배우를 섭외하게 된 칼. 변두리 스트립쇼 극장가를 찾은 칼의 눈에 스트립쇼 극장 앞에서 망설이다 차마 들어가지 못하고 돌아서는 앤의 모습이 들어온다. 자존심을 지키고자 돌아섰지만 며칠째 식사를 하지 못한 앤은 노점상의 사과 한 알을 훔치다 들키고 칼의 도움으로 곤경을 면하게 된다. 앤은 갑작스레 식사까지 대접하며 캐스팅 제의를 하는 낯선 남자의 제안과 정체가 불안하지만 잭 드리스콜이 극본을 쓴다는 말에 칼을 따라 항구로 나선다. 영화 극본을 쓰던 잭 드리스콜(애드리안 브로디)을 감언이설로 배까지 오게 한 칼은 선장을 구슬려 마구잡이로 배를 출발시키고, 잭은 어쩔 수 없이 무모한 모험의 일원이 되고 만다. 그들의 앞에 놓인 운명을 예고라도 하듯이 배의 이름마저 벤처(Venture)다.

 


▲ 해골섬의 장관을 찍기 위해 스탭과 함께 상륙하려는 칼 감독과 일행.

 

한가로이 선상 촬영을 하며 순항하던 배에 칼을 체포해 랭군으로 귀항하라는 전보가 들어오고 촬영장 분위기는 어수선해진다. 그러던 중 배는 풍랑과 함께 위치를 가늠할 수 없는 해골섬으로 떠밀려 간다. 칼은 미지의 세계를 필름에 담을 욕심으로 일행을 재촉해 섬으로 향하지만 원주민에게 앤을 뺏기고, 목숨만 건져 간신히 모선으로 돌아온다. 다시 전열을 가다듬고 구출대와 함께 섬으로 가지만 이미 앤은 원주민에 의해 거대한 고릴라 ‘킹콩’의 제물로 바쳐지고 난 뒤다.

 


▲ (위, 좌) 킹콩에게 제물로 바쳐진 앤 대로우.
(위, 우) 킹콩의 1:3대 결투. 이 장면만 없었더라면 더 멋진 작품이었을 텐데 아쉽다.
(아래) 모험을 함께한 뒤 킹콩의 숙소에서 석양을 바라보는 두 주인공.

 

구출대는 킹콩을 뒤쫒지만 역부족이다. 앤은 기지를 발휘해 코메디 연기를 펼쳐 킹콩을 구슬린다. 그러다 영화는 갑자기 쥬라기 공원으로 배경을 옮긴 듯 공룡들이 등장하고 심지어 앤을 보호하려는 킹콩과 티라노 사우르스의 1대 3 사투가 벌어진다.(이 부분은 정말 넌센스다.) 이런 고난을 겪으며 킹콩과 앤 사이에는 신뢰의 기류가 생기기 시작한다. 킹콩의 보금자리인 절벽 위에서 둘이 함께 석양을 바라보며 교감하는 장면은 아름답기까지 하다. 천신만고 끝에 앤을 구조한 잭이 킹콩의 추격을 받으며 돌아오지만 칼은 킹콩을 마취제로 생포하기 위해 둘을 이용한다. 영화는 이미 망쳤으니 대신 킹콩을 데려가 흥행을 시키겠다는 칼과 선장의 욕심이 결탁된 것이다.

 


▲ (좌) 화려한 조명과 도시.
(우) 극장의 무대위에 선 킹콩.

 

영화는 다시 뉴욕. 킹콩의 생포에 반대를 했던 앤은 다른 극장의 무용수로 돌아가고, 잭은 소규모 극장에서 자신의 극본을 무대에 올리고 있다. 그 순간 화려한 조명의 타임스퀘어의 대규모 극장에서는 칼이 ‘세계 8번째 불가사의’라며 킹콩을 소개한다. 크롬으로 제작된 쇠사슬과 족쇄를 채웠다고는 하지만 킹콩을 제어하기는 역부족이다. 순식간에 극장은 아수라장이 되고, 앤을 구조했던 잭을 발견하고 추격하는 킹콩과 택시를 몰며 킹콩을 외곽으로 유인하려다 충돌해 정신을 잃은 잭. 그 일촉즉발의 순간 킹콩의 앞에 나타난 앤. 킹콩은 앤을 데리고 군 추격대를 피해 센트럴파크로 도망을 간다. 재회한 둘은 잠시나마 센트럴파크의 얼음이 언 호수 위에서 망중한을 지내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추격을 피해 달아나게 된다. 쫒기던 킹콩의 눈에 높이 치솟은 거대한 건물,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이 들어온다.

 


▲ (위, 좌) 마침내 다시 만난 킹콩과 앤 대로우 /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위에서 바라보는 일출. 킹콩의 고향 풍경과 닮았다.
(중) 킹콩 뒤로 보이는 반복적인 특징의 아르데코 문양.
(아래) 킹콩은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위에서 앤을 뒤로하고 슬픈 죽음을 맞이한다.

 

빌딩의 꼭대기로 올라간 킹콩과 앤. 둘 앞에 펼쳐지는 낯익은 풍경. 그러나 이번엔 석양이 아니라 아침 해가 떠오르는 풍경이다. 킹콩은 자신의 절벽에서 앤이 “아름답다!”며 가슴에 손을 대던 제스쳐를 그대로 보여준다. 빌딩에서 바라보는 일출이 ‘아름답다’는 것이다. 그 의미를 이해한 앤의 눈에는 눈물이 고인다. 평화의 시간도 잠시 킹콩을 제거하기 위한 비행편대가 나타난다. 킹콩은 앤을 밀쳐내고 알 수 없는 대상들의 적의에 맞서 저항하다 결국 포기의 눈길로 빌딩 아래로 스러져간다. 킹콩의 주검 앞에서 한 기자가 의문을 품는다. ‘왜 저 높은 곳까지 올라가서 죽었을까? 혹 자신의 운명을 알기라도 했던 걸까?’

왜 수많은 건물 중에서도 꼭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이어야만 했을까?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은 뉴욕의 대표적인 아르데코 양식의 건물이다. 아르누보에 이어 세계를 휩쓴 양식인 아르데코는 1925년 파리에서 열린 ‘현대장식미술, 산업미술국제전’에서 비롯된 장식미술인 아르 데코 라티프(art decorafif)의 약칭이다. 곡선적인 아르누보와 달리 대칭적인 구도와 직선적 형태, 태양광선 모양, 지그재그, 첨탑 등의 기하학적 모티브와 꽃, 동물 그리고 인간의 형체를 기하적 형태로 표현한 장식적 스타일이다.

 


▲ (좌) 멀리서 보이는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우) 입구 위의 아르데코 장식들.

 


▲ (좌) 록펠러센터 메인건물에 붙어있는 아르데코 스타일의 부조 작품(리 로우리에 1933년 작).
(중) 거대 잡지사인 허스트 본사. 아르데코 양식의 원래 건물을 유지한 채 그 위로 새로이 증축을 했다.
(우) 아르데코 양식의 건물과 외벽 장식물들.

 

더 이상 예전의 수공예적 신전과 궁전이 세워지지 않는 근대의 시기에는 자본주의가 신성의 이미지를 대체해 나갔다. 자연적인 곡선이 배제되고 인공적인 선과 형태로 새롭게 장식된 아르데코 스타일의 마천루들은 수직적으로 치솟으며 새로운 신성인 ‘기술과 문명’의 상징으로 근대 도시의 스카이라인을 장악해나갔다. 그 중에서도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은 그 규모와 기술면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했고, 기술과 자본의 거대 성전이나 다름없었다. 아르데코 양식 중에서도 특히 남성적인 면이 강조되었다. 완공 당시부터 41년간 세계 최고층 건물로서 아르데코의 메트로폴리스라 불리는 맨해튼에서도 제왕자리를 지켜왔던 건물이다.
그래서 정글의 제왕 킹콩의 눈에도 그 상징성이 보였던 것은 아닐까? 거리에 수많은 알파벳 간판은 읽을 수 없었지만, 멀리서도 눈에 띄고, 화려한 조명과 함께 아르데코로 장식된 그 빌딩은 알아 볼 수 있었으리라. 자신의 몸을 숨길 수도 없고, 자신이 지배할 수도 없는 문명의 정글에서 최후를 맞이하기에 어울리는 장소로는 그 곳 밖에 없다는 것을.

 


▲ (좌, 중) 1925, 1930년에 발행된 뉴요커 잡지의 아르데코 양식의 표지.
(우) 아르데코 양식의 대표적 디자이너인 카상드르의 ‘노르망디’.

 

1930년대에는 그래픽 디자인계도 아르데코를 피해갈 수는 없었다. 수많은 포스터와 잡지 표지를 아르데코 양식의 일러스트로 가득 채웠다. 노르망디라는 포스터로 유명한 카상드르가 대표적이다. 웅장한 구도와 수직적 배치와 미래적인 상황 등의 묘사가 특징적이다. 이 시기의 애용된 폰트들은 세리프가 없고 가느다란 산세리프들이 주를 이룬다. 전통적인 세리프체보다는 미래적인 느낌을 주는 산세리프가 어울렸을 것이다.

영화는 1930년대를 재현하기 위해 무척이나 애를 썼지만 미술스텝에는 타이포그래피에 조예가 있는 사람은 없었나 보다. 거리의 간판 중에는 딘(DIN) 폰트처럼 영화의 시대적 배경보다 뒤에 나온 폰트들이 간혹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타이포그래피를 직업으로 가진 사람들이 역사극에 몰입해서 보기 힘들다는 말이 있나 보다.

 

출처: 타이포그래피 서울 – TypographySeoul, http://www.typography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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