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이너, 잘못된 상징에 분노하다

위험하기 짝이 없는 1990년대 뉴욕의 밤거리. 번쩍이는 경광등, 요란한 사이렌 소리와 함께 달리는 구급차. 그 구급차에는 응급요원 5년차인 프랭크 피어스(니콜라스 케이지)가 타고 있다.

▲ (위) 뉴욕의 밤을 가로지르며 질주하는 앰뷸런스.
▲ (아래) 자신이 구하지 못한 생명에 대해 자책감을 느끼는 프랭크.

그는 밤 12시에서 아침 8시까지 뉴욕 맨해튼을 순찰하며 사고로 다치거나 발작을 일으킨 환자를 응급처치하고 수송하는 업무를 수행한다. 현장에 출동하여 생명을 구했을 때의 성취감은 최고의 마약이라고까지 말했던 프랭크. 하지만 그는 자신이 구하지 못한 길거리의 여자 로즈에 대한 자책감에 시달리는 중이다. 로즈의 생명을 구조해내지 못한 뒤로 슬럼프에 빠졌는지, 그는 출동을 해도 계속해서 생명을 구하지 못한다. 급기야 프랭크는 “나는 한 번 육신을 빠져나온 영혼은 다시는 자신의 몸으로 들어가기 싫어한다고 믿는다”라는 말까지 되뇐다.
그러던 중 심장마비를 일으킨 노인을 기사회생시켜 병원으로 이송하게 되고, 이 와중에 만난 노인의 딸 메리 버트에게 친밀감을 느끼게 된다. 응급실 단골인 골치 아픈 환자, 마약 중독자와 마약 상인에 이르기까지…. 이렇게 어둠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과 프랭크의 피로에 젖은 3일간이 영화 <비상근무 Bringing Out the Dead>(1999)의 주요 줄거리다.

▲ (위) 앰뷸런스는 눈에 잘 띄도록 디자인되어 있다.
▲ (아래) 앰뷸런스의 전면에 표기된 글씨는 좌우가 뒤집혀 있다.

영화 속 화면을 채우는 대부분의 장면들은 무채색의 어두운 밤거리와 밝지만 아수라장인 병원 응급실이다. 그중에서도 유독 돋보이는 건 바로 앰뷸런스의 색깔이다. 백색 몸체에 청색 심벌과 오렌지색 라인으로 치장된 앰뷸런스에서만 생동감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구급차 전면에 쓰인 ‘AMBULANCE’라는 단어의 좌우가 뒤집혀 있다는 점이다. 마치 거울에 비친 것처럼 말이다. 이것은 잘못된 게 아니라 실제 상황의 긴박함을 반영한 디자인이다. 구급차는 대체로 급히 이송을 해야 한다. 그러나 교통상황이 여의치 않을 때가 있다. 부득이 양보를 요청하며 달려가게 된다. 이때 구급차 앞에 있는 차의 운전자는 룸미러나 리어미러로 구급차를 보게 된다. 앞차의 운전자가 좀 더 쉽고 빠르게 구급차임을 인지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반전시킨 디자인이다.

▲ 어느 것이 즉각적으로 읽히고 이해가 되는가?

그리고 앰뷸런스에 사용된 글씨체가 그 유명한 헬베티카다. 1957년 처음 세상에 나온 헬베티카는 1970년 이후에야 뉴욕에 상륙하게 되었다. 이후 뉴욕 지하철 사인(sign) 시스템 디자인에 적용된 효과에 힘입어 공공기관의 지정 서체로 빠르게 확산되기 시작했다. 모더니즘의 대표적인 서체로서 공공∙공익의 이미지를 갖게 된 것이다.
문제는 공공기관뿐만 아니라 기업체들까지 헬베티카로 자신들의 로고타입을 디자인하며 공익적인 이미지를 기업 이미지로 포장하려는 데 있다. 그러다 보니 이제는 역설적으로, 헬베티카는 기득권적인 이미지를 갖게 되었다. 다큐멘터리 영화인 <헬베티카>를 보면 이런 말이 나온다. “월남전을 후원한 기업들 모두가 헬베티카로 로고를 만들었다. 즉 헬베티카를 사용한다는 것은 그 기업들을 용인하는 것이고 월남전을 정당화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일개 서체이지만 때로는 그 서체가 대변하는 체제와 정체성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 앰뷸런스 뒷문과 프랭크의 제복에 새겨진 심벌. ‘생명의 별’로 불린다.

메리는 구급차에 실린 아버지 곁에 함께 탑승하려 하지만, 프랭크는 그녀를 만류한다. 결국 프랭크는 구급차의 뒷문을 닫아버린다. 이때 구급차 뒷문 유리창에 새겨진 심벌을 보자. 이 심벌은 ‘생명의 별(Star of Life)’이라고 불리는 것으로, 1977년 미국 국립고속도로교통안전국에서 제정한 것이다. 6꼭지의 별 모양 위에 있는 지팡이를 뱀 한 마리가 휘감고 있는 모양이다. 그런데 이 심벌이 구급차와 무슨 상관이 있는 걸까?

▲ 왼쪽이 아스클레피오스, 오른쪽이 헤르메스. 지팡이와 뱀이 다르다.

여기에서 지팡이와 뱀은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의술의 신 아스클레피오스의 것이다. 아스클레피오스는 기원전부터 유능한 의사의 대명사였다. 그는 신들의 왕 제우스의 번개를 맞아 죽은 글라우코스를 소생시키고자 치료를 하게 되는데, 그때 뱀 한 마리가 방 안으로 들어온다. 놀란 아스클레피오스는 자신의 지팡이로 뱀을 죽인다. 잠시 후 다른 뱀 한 마리가 약초를 입에 물고 들어와 죽은 뱀 입 위에 올려 놓자 죽은 뱀이 다시 살아났다. 이를 본 아스클레피오스도 뱀을 따라서 그 약초를 글라우코스의 입에 갖다 대어 살려냈다. 이후 그는 존경의 의미로 지팡이를 휘감고 있는 뱀 한 마리를 자신의 상징으로 삼았다고 한다.
현재 사용되고 있는 이 심벌의 별은 각 꼭짓점마다 응급의료 관계자의 의무를 담고 있다. 맨 위의 점부터 시계방향으로 ①조기발견, ②조기보고, ③조기대응, ④현장처치, ⑤운송 중 처치, ⑥치료기관으로의 최종 후송 등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의학계를 대표하는 대한의사협회의 휘장을 보면 뱀이 한 마리가 아닌 두 마리이고, 지팡이에는 날개까지 달려 있다. 이것은 아스클레피오스의 지팡이가 아니라 헤르메스의 지팡이다. 헤르메스는 상인, 도적, 연금술사의 신이자 죽은 자를 하데스(죽은 자들의 나라)로 이끄는 안내자의 상징이다. 즉, 의학에는 어울리지 않는 상징인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한국의 대표 의학단체가 헤르메스의 지팡이를 사용하게 되었을까?

▲ 왼쪽부터 차레로 미군의무부대 휘장, 대한의사협회 휘장, WHO(세계보건기구) 휘장.

한국이 헤르메스 지팡이를 의학 휘장에 사용하게 된 경위는 2007년 6월 <의사학(醫史學)> 16권 제1호에 실린 ‘대한의사협회 휘장의 소사: 아스클레피오스의 지팡이와 헤르메스의 지팡이’(신영전 글)에 자세히 소개되어 있다.
간추리자면 예전부터 북미로 많은 의학서적을 수출했던 런던 처칠 출판사의 문장이 헤르메스의 지팡이였고, 미국의 출판사들은 이 문장이 의학의 상징이라고 오인해 의학 관련 서적에 사용했다는 것. 이로 인해 북미의 의사들도 덩달아 이런 잘못된 인식을 공유했다고 한다.
이후 미군 의무부대가 1902년에 헤르메스 지팡이를 휘장으로 채택했고, 제2차 세계대전 말 미군정이 한국에 주둔하게 되면서 그 영향으로 대한의사협회 휘장에도 헤르메스의 지팡이가 적용되었다는 것이다. 최초의 휘장은 1947년에 공모에 의해 정해졌는데 당선자는 대표적 친일 미술인인 조병덕이었다고 한다. 그 뒤 몇 차례의 수정을 거쳤고, 오늘날의 형태는 1995년 6월 공모하여 1996년 4월에 최종 공표한 것이라고 한다. 너무도 아쉬운 것은 지팡이의 상징성에 대한 깊은 고찰 없이 초기의 잘못된 휘장을 토대로 단순 발전시킨 안이한 접근이다. 조금만 더 역사적 고찰과 상징에 대해 연구했더라면 이런 오류를 반복하지 않을 수 있었을 것이다. 디자인의 형태도 불만족스럽다. 1996년이면 88올림픽으로부터 10년 가까이 흐른 때이다. 국내의 디자인업계도 이미 세계적 수준에 도달한 시점이다. 도저히 1996년에 디자인되었다고 보기에는 어려운 형태다.

▲ 대한의사협회 휘장 변천사.

영화 속 뉴욕의 밤은 반짝이는 대낮이 마치 무대의 세트라도 되는 것처럼 피 흘리고, 다치고, 망가지고, 부서진다. 상징의 대상에 대한 깊은 애정과 보살핌 없는 디자인 역시 뉴욕의 낮과 밤이나 매한가지 아닐까? 매끄러운 겉모양과 달리 그 뒤에서 의미는 비틀어지고 왜곡되는 것이다. 더 무서운 것은 그것이 개선되지 않고 반복되며 원래의 의미를 말살할 때다. 디자이너는 어쩌면 잘못된 의미와 상징을 바로잡는 응급요원이 되어야 한다!

출처: 타이포그래피 서울 – Typography Seoul, http://www.typographyseoul.com